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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후기

추상성이란 세계에서 카메라가 살아남는 법, 영화 <욕망>

by 2월56일 2024.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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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주관이 가득 포함되어 있음*

*스포일러 포함*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은 딱 봐도 어려운 영화다. 고전적인 풍미가 가득하고, 무슨 내용인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다. 등장인물들은 왜 저러는지 모르겠고, 뭔가 희미하게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미장센은 혼란을 안겨주기엔 충분하다. 그렇다보니, '욕망'에 대한 관점이 카메라 안이 아닌 바깥으로 나가야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욕망'은 충동적이다. 극의 진행과정도 그렇고, 등장인물들도 그렇다. 추상화도 그렇다. '욕망'은 카메라가 추상성을 담아낼 수 있느냐에 대한 영화처럼 보인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이미지화 하기 쉽지 않다. 사람의 뇌에서 나온 무언가를 그림으로 담아낼 순 있겠지만, 1966년의 당시에는 카메라로 이루어내긴 어려울 것이다. 물론 2년 뒤에 스탠리 큐브릭은 그걸 성공시키긴 했지만.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이 추상성을 각본에도 녹여내고, 인물에게도 녹여내 추상화의 충동성을 영화로 완성시킨다.

직선적이고 각진 이미지와 곡선의 대립이 눈에 띈다. 직선적인 이미지는 일정한 톤과는 관계없이 각자의 색을 빛내고, 곡선적인 이미지는 전반적인 톤과 분위기가 느껴진다. 영화 내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건물들과 작업소 내부의 소품들은 각자만의 독자적인 컬러를 주위의 요소와는 관계없이 강하게 뿜어내고, 공원과 골동품 상점과도 같은 로케이션은 전체적인 톤이 존재한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마치 현대미술과 고전미술간의 대립처럼 보인다. 영화 속 카메라는 둥근 렌즈로 곡선적인 사람을 촬영한다. 그런 고전적인 위치에 있는 카메라가 현대미술처럼 실존하지 않는 무언가를 포착해낼 수 있을까. 정지한 사진은 비실존과 추상을 잡아내기는 어렵겠지만, 사진의 연속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카메라는 현대미술의 세계에서 그렇게 살아남는다.

주인공은 끝에 가서 사라진다. 하지만 그를 찍던 카메라는 살아있다. 그의 사진 한 장은 판토마임을 담을 수 없지만, 사진의 연속은 판토마임을 테니스 경기로 탈바꿈시킨다. 행위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주인공의 시선을 보여주고 소리를 들려주는 방식을 통해 추상성을 완성한다. 카메라로 추상화처럼 영화를 그려낼 수 있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하는 결말이 아닐까 한다.


★★★☆+ (3.5 / 5.0)

 

이미지출처: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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